캐나다 특유의 버터바른 스케이팅은 버틀의 것이지만, 그것을 안무로 뽑아내는 것은 윌슨의 공이다. 즉, 선수의 재능을 살리는 안무를 빚어내는 안목을 갖고 있다. 상반신의 엄청난 움직임을 동반하는 꽉 찬 '춤'을 보시길. 3:45" 이후 음악의 전환부에서 전개되는, 고요를 가르는 변형 이나바우어가 보여주는 아우라는 버틀의 스케이팅과 윌슨의 음악 배분+안무 역량이 빚어낸 최상의 장면 중 하나이다.
윌슨이 상큼발랄함을 이끌어낸 스케이터가 연아 선수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I've Got Rhythm은 필자 본인에게는 에밀리 휴즈라는 선수를 완전히 새로 보게 만든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램 전반에 갓 18세 아가씨의 톡- 톡- 튀는 느낌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결합되어있다. 프로그램 요소 요소마다 보이는 부드러운 팔놀림과 손끝 마디의 미묘한 포즈를 눈여겨 보시길. 1:40"경 약간의 스파이럴 자세로 도입하는 더블악셀과 다시 이어지는 스파이럴 시퀀스, 그리고 부드러운 음악의 전환이 잘 맞아 떨어진다. 신체의 곡선을 잘 살리는 안무 또한 윌슨의 프로그램이 가진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에밀리 휴즈의 친언니인 사라 휴즈는 2002 솔트레이크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였다. 언니만큼의 성장가능성도 엿보인다.-
위 프로그램들에서 보이는 윌슨표 프로그램들의 장점이 '김연아'라고 하는 그릇에서 더욱 빛날 수 밖에. 자신있고 쾌활한 성격, 예쁜 얼굴과 해가 갈 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몸매, 스케이팅 스킬과 점프는 물론 표현력과 끼 혹은 스타성, 완벽을 추구하는 연습량에 이르기까지 어쩌다 한국에 태어난 것이 신의 축북이라고 해도 좋을 이 토털 패키지 아가씨는 윌슨의 예술적 영감을 마구마구 자극하는 대상이자 최상의 재료인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종달새의 비상"은 김연아라고 하는 선수에게 최적화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아주 빼어난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나 2007 - 2008 시즌부터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그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 해 바로 그 나이의 김연아가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은반 위에 그려넣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전반에 걸친 상큼발랄함. 한 번도 클린한 적이 없어서 팬들 스스로가 짜깁기 영상을 통해 클린버전을 만들어 감상하고 싶어할 만큼 귀여웠으며 또한 안타까웠다. 압권은 모두가 기억하는 2:35"의 '으쓱 으쓱' 부분. 각 선수들과 안무가들이 쏟아내는 작품들이 많은 만큼 부분 부분 끊어서 보면 비슷한 안무를 여러 번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으쓱거리는 안무는 이게 처음인 듯 싶다. 발랄한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최대한 이끌어낸 한 안무로서 팬들을 말 그대로 '쓰러지게'만들었던 부분이다. 필자가 어느 느즌 밤 TV를 뚫어져라 보다가 박수치고 쓰러지면서 "윌슨 천재!"라고 외쳤던 것 또한 결코 거짓이 아니다.
박쥐에 이은 FS "미스 사이공"은 앳된 처녀의 애절함을 서사에 담아서 보여준다. 바야흐로 김연아의 '표현력'에 대해서 세상이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때부터인데, 상상이 안 되겠지만, 그 모든 표정 하나하나를 어떻게 해야할지 윌슨은 스스로 연아에게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영상들은 예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들을 참고해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또한 국내에서도 김연아의 팬덤과 일부 소수의 '질럿'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2008-2009 시즌에서 김연아에 대한 윌슨의 완성된 '이해' 그리고 선수 자신의 기술적, 육체적, 정신적 '성장'을 바탕으로 하나의 마스터피스가 남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의 무도'이다. 바로 전 시즌에서의 비상과 함께 엄청난 매스컴과 CF, 대중의 시선이 가져오는 홍수를 잘도 견뎌낸 그녀에게는 '자신감'과 '과감함'이라는 커다란 무기가 추가되었고 윌슨은 이를 제대로 보았다.죽음의 무도에는 선수의 갓 피어오르는 팜므 파탈적 매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매력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소화하기 힘들 것이 분명한 도입부의 강렬함, 그렇게 반복적으로 회자된 트리플 러츠의 착지 동작에서의 안무, 때로는 마음을 애절하게 쥐어내는듯 하면서도 사람을 홀리는 듯한 표정과 몸짓, 춤의 곡선과 입체감이 살아있는 엔딩포즈. 그야말로 시간을 빨아들이는 느낌을 주는, 2008년의 김연아에게 최적화된 완성형이었다. 필자가 윌슨에게서 경탄하는 바는 언제부턴가 그저 매 시즌 선수에게 훌륭한 프로그램을 남겨주는 것을 떠나서, 연기의 세부를 지도하는 것을 넘어서, 선수의 성장과 함께 변화하는 매력을 매 시즌마다 새롭게 프로그램에 담아내고 그 결과 그 해 바로 그 순간의 선수가 연기해야만 최고로 빛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서사인 '세헤라자데'조차 2008년의 김연아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데이빗 윌슨의 안목이다.
서두에 언급했듯, '죽음의 무도'에서 보여준 완성형에서 더 나아간 이번 시즌의 '007 제임스 본드 메들리'는 여성의 신체곡선과 김연아의 자신감이라는 무기를 한층 더 강조한 업그레이드 작품이다. 다리를 쓸어올리는 몸짓, 허리에 얹은 손과 유려한 곡선, 지난 시즌부터 점프 도약시의 균형에 변화가 생길 만큼 유독 성장한 여성적 느낌이 과하지도, 결코 지저분하지도 않게 매력적으로,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 쯤 되면 윌슨에게 박수를 보낼만 하지 않은가? 따라서 독자 제현 일동 박수. 짝짝짝.
그리고 FS인 "Concerto in F by G. Gershwin"은, 정말 오랫만의 서사가 아닌 FS로서 포커스가 곡과 선수에게 모두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선수에 대한 부각이 이전시즌보다 훨씬 더하다. 본래 피겨계가 갖고 있는 채점의 관행 중의 하나가 바로 선수의 클래스에 대한 인정으로 이전에 특정한 수준으로 인정받은 선수의 퍼포먼스는 나빠지지 않는 한 관례적으로 그 정도의 수준으로 인정해준다. 하물며 이미 지난 시즌에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연아의 새로운 연기가 이전 시즌보다 더 매력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니, 모든 PCS가 8점대를 기록하는 놀라운 스코어가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그리고 그와 같은 PCS를 한 조각 한 조각 빚어가는 것 또한 안무가 윌슨의 공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무대 뒤, 커튼 너머의 힘든 선수 생활로 김연아 선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면 그만두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이 바로 그 올림픽 시즌이다. 시즌의 개막을 알리는 그랑프리 시리즈 1차전, 파리에서 개최된 에릭 봉파르에서 김연아는 다른 경쟁자들과의 격차가 한 없이 벌어질 것만 같은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PCS의 레벨도 그동안 '퍼받는다'는 이야기가 많았던 일본의 아사다 마오를 뛰어넘는 수준에 도달했다. - 아사다 마오의 PCS가 고평가받는 이유 또한 '잽머니 운운' 이전에 그녀의 커리어에 대한 피겨계의 관행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가와 성공률이 어찌되었건 2006-2007 시즌 월드 2위, 2007-2008 시즌 월드 1위의 랭커였다.(3A의 랜딩에 관해서는 토냐 하딩과 나카노 유카리에 대한 지적이 있어서 수정: 마오 외의 또 다른 선수 였던 토냐 하딩은 남편을 사주해서 라이벌인 낸시 캐리건을 테러한 사건으로 영구제명. 또한 달산님 지적에 따르면 나카노 유카리 또한 3A를 랜딩하였음) - 필자 스스로도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시즌의 시작부터 그녀는 기록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다.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안는다면. 그 꿈이 이루어지면, 그래서 그녀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거짓말처럼 농담처럼 은퇴를 선언해버린다면, 팬들보다 더 아쉬워할 사람은 오서보다도 윌슨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오서의 못 다 이룬 금메달의 꿈은 제자인 연아 선수가 이루어준다고 하여도, 크리에이터인 윌슨에게는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할 그녀와 만들고 싶은 안무가 아직 한 가득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가 꿈꾸고 있을 프로그램들에 대한 기대가, 바로 필자가 이번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그 다음, 그 다음 시즌을 계속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 사족: 이번 "007 제임스본드 메들리"를 보고 이미 007을 테마로 한 SP 'Die Another Day'로 월드 타이틀을 석권한 프랑스의 브라이언 쥬벨-분명 봤을 거라 생각됨-이 연아양에게 듀엣 신청이라도 하면 어찌될지 궁금해진다. 본드 쥬벨과 본드걸 연아는 영화로 찍어도 나름 괜찮은 조합일 듯. 이번 연아양의 SP에 대해서 2ch 등에서 보이는 "등에 007을 써라!" 따위의 농담은 쥬벨의 2006-2007 시즌 SP의 복장에서 따온 이야기이다. 다음 링크를 따라가면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으니 이것 또한 필견. 연아양의 본드가 본드걸의 매력에 포커스를 두었다면 이 작품은 시작부터 쿼드러플토룹-트리플토룹이 작렬하는 본드의 액션 위주의 작품이다. 감상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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